오바마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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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주한미국대사관

 

오바마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
오슬로 시청
노르웨이 오슬로

오후 1시 44분(중앙유럽 표준시)
대통령:  국왕 폐하와 왕실 귀족 여러분, 존경하는 노벨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미국과 세계 각국 국민 여러분.
 
저는 이 영광을 얻게 된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며 매우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 상은 세상의 온갖 고초와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단순히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는, 가장 높은 경지의 열망을 웅변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중요성을 가지며 역사를 정의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관대한 결정이 불러일으킨 상당한 논란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제가 태만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웃음) 이는 부분적으로는 제가 국제 무대에서 제 목표들을 마무리하는 단계가 아니라 착수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나 킹, 마셜, 만델라 등 이 상을 수상한 역사적인 위인들과 비교한다면 제 업적은 초라합니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는 정의를 위해 투쟁하다 투옥되고 가혹한 구타로 고통을 받는 투사들이 있으며 인도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인류의 고통을 덜기 위해 희생하는 이들이 있고 냉소적인 비판론자들조차 감복시킬 만한 용기와 열정을 말 없이 실천하는 수백만 명의 숨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저보다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러한 후보들을―세상에 알려진 이름이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직접 도움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가 알려진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찾아낸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상을 수상한 것과 관련하여 가장 심각하게 제기된 문제점은 아마도 저 자신이 현재 두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의 군통수권자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현재 정리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며 미국과 전세계를 추가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포함하여 전세계 42개국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저는 머나먼 전장으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파병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적을 살상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살상을 당할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전쟁과 평화 간의 관계 그리고 전쟁을 평화로 대체하려는 노력에 관련된 난해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은 가운데 전쟁에 수반되는 희생을 절절히 통감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형태가 어떠했건 간에 전쟁은 최초의 인류와 함께 태동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새벽을 열 당시에는 아무도 전쟁의 도덕성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가뭄이나 질병처럼 하나의 현실이었으며 부족, 그리고 뒤이은 문명 사회가 권력을 획득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법률을 통해 집단 내의 폭력을 통제하게 되었으며 철학자와 종교 지도자 그리고 정치인들은 전쟁의 파괴력을 제어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서 혹은 자위 수단으로서만 수행되고 전쟁에 투입되는 군사력이 균형적이며 가능한 경우 민간인의 희생을 방지한다는 등의 특정한 전제 조건들이 충족된 경우라야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 대부분을 통해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혁신적인 살상 수단을 고안해내는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이 입증됐으며 외모가 다르거나 다른 신을 믿는 집단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능력 역시 무한했습니다. 군대 간의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군인과 민간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전면전―으로 발전했습니다. 30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살육이 유럽 대륙을 집어 삼켰습니다. 제3제국과 추축국을 격멸하는 것보다 더 정의로운 명분은 생각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사망한 민간인의 수는 군인 사망자를 능가했습니다. 

이처럼 파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그리고 핵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전승국과 패전국 모두 더이상의 전쟁을 방지하는 국제 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드로우 윌슨이 이 상을 수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국제연맹을 미국 상원이 거부한 지 4반세기가 지난 후에 미국은 마셜 플랜과 유엔, 전쟁 통제 장치, 인권을 보호하고 인종 말살을 금지하며 위험한 무기를 제한하는 각종 조약 등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렇습니다. 끔찍한 전쟁들이 일어났고 잔혹한 사건들이 자행됐습니다. 하지만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환희에 찬 군중이 장벽을 허물면서 냉전은 종식됐습니다. 상거래가 세계 대부분의 지역을 봉합시켰습니다. 수십억 명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자유와 자결, 평등과 법치의 이념들이 더디게나마 진전을 이룩했습니다. 우리는 앞선 세대의 끈기와 예지를 물려받았으며, 이는 제 조국이 마땅히 자긍심을 느낄 만한 중요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과거의 체제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여 삐걱대고 있습니다. 세계는 더이상 양대 강대국 간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지만 핵 확산으로 인해 재앙의 위험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테러는 오랜 동안 전술의 하나였지만 분노로 가득 찬 소수의 집단이 첨단 기술을 악용하여 무고한 인명을 엄청난 규모로 살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간의 전쟁은 갈수록 내전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종 혹은 분파 분쟁의 재발, 분리주의 세력의 확대, 내란, 국가 파탄 등으로 인해 민간인들이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비규환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현대전에서는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훨씬 많습니다. 분쟁의 불씨가 자라고 경제는 피폐해지며 시민사회는 산산이 와해되는 동시에 난민이 폭증하고 어린이들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저는 전쟁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대책을 갖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도전에 맞서려면 이미 수십 년 전에 용기 있는 행동을 실천에 옮긴 전 세대와 동일한 비전과 노력 그리고 인내가 요구된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정의로운 전쟁의 개념과 정의로운 평화의 당위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폭력적인 분쟁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앞으로 국가들이―단독으로, 혹은 힘을 합쳐―반드시 필요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생길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바로 이 자리에서 “폭력은 결코 항구적인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 폭력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폭력은 단지 더욱 복잡한 새로운 폭력을 낳을 뿐이다”라고 역설한 마틴 루터 킹의 말을 되새기며 제 생각을 천명하고자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평생을 바친 헌신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사람으로서 저는 비폭력 운동의 도덕적 저력을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저는 간디나 킹의 삶과 믿음이 추호도 미약하거나 수동적이거나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국을 보호하고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국가 수반으로서 저는 오직 그들의 선례만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세계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들을 겨냥한 위협을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는 사악한 무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비폭력 운동이 히틀러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협상을 통해 알 카에다 수뇌들이 무기를 버리도록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이는 역사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인간의 불완전성과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점을 먼저 지적한 이유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군사적 행동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표시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여기에 세계 유일의 군사 강대국인 미국에 대한 반사적인 반감이 결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단순히 국제 기구들―조약이나 선언들―덕분에 세계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 실수를 범한 경우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즉 미국은 자국민의 희생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난 60년 이상 국제 안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는 점입니다. 미군 장병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 독일과 한국에서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으며 발칸 반도 등의 지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의지를 관철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책무를 자임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계몽된 자국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그 같은 행동을 실천에 옮겼습니다―미국은 우리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며 다른 국가의 아이들이 자유와 번영을 구가할 때 우리 아이들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이라는 수단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일익을 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는 아무리 정당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인류에게 비극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또 다른 진리와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군인의 용기와 희생은 가장 명예로운 대상이며 조국과 명분 그리고 전우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는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떠벌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겉보기에 결코 융화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진리를―때때로 전쟁이 필요하다는 진리와 전쟁은 어느 선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표출된 결과라는 진리를―융화시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래 전에 케네디 대통령이 촉구한 바 있는 과업에 노력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는 “인간 본성의 갑작스러운 변혁이 아닌 제도의 점진적인 발전에 기초한 보다 실질적이고 보다 달성 가능한 평화에 집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도의 점진적인 발전 말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요? 이러한 실질적인 절차들은 무엇일까요?
먼저, 저는 강대국이건 약소국이건 세계 모든 나라가 무력의 사용을 감독하는 규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른 국가 수반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일방적으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규약을 준수하는 국가는 국력이 강화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국가는 소외되고 국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세계는 9•11테러 직후 미국을 중심으로 결집했으며 지금까지도 아프간에서 미국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자비한 테러 공격에 대한 공포와 자위 원칙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세계는 그에 맞서야 할 당위성을 인식했으며 침공의 대가가 어떠할 것인지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하는 의견의 합일을 이뤘습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나라도 자국은 이행하지 않는 규칙을 다른 나라에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자의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으며 아무리 정당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장래에 군사적 개입의 정당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군사적 행동이 자위 혹은 침략자에 대항하는 방어의 범위를 벗어난 경우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됩니다. 정부가 자국민을 상대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를 저지하거나 내전으로 인한 폭력과 고통이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상황을 종식시켜야 하는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발칸 반도나 전쟁의 상흔을 입은 그 밖의 지역들에서처럼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응은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훗날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확고한 임무를 부여받은 군대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책임 있는 각국 정부가 반드시 떠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 안보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의지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협이 분산되고 임무가 복잡해진 상황에 미국은 홀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는 평화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아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러와 해적 집단이 주민의 기근과 고통에 더해진 소말리아 같은 파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내정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것입니다.

나토 회원국과 그 밖의 우방 및 동맹국 지도자와 장병들은 아프간에서 그들이 보여준 역량과 용기를 통해 그러한 진리를 입증했습니다. 하지만 장병들의 희생과 일반 국민들의 불신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저는 전쟁이 외면을 받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만으로는 결코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평화에는 책임이 요구됩니다. 평화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나토가 필수불가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엔과 지역 평화유지군 활동을 강화하는 동시에 몇몇 국가들에게만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외에서 평화유지군 활동과 훈련을 마치고 오슬로와 로마, 오타와와 시드니, 다카와 키갈리로 귀환하는 장병들의 공로를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 수행자가 아닌 평화 수호자로서 그들의 공로를 기립니다.

무력의 사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참전 여부를 놓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분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노벨위원회는 초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국제적십자 창립자로 제네바 협정의 체결을 이끈 앙리 뒤낭을 선정하면서 이 진리를 확인한 바 있습니다.

무력이 필요한 경우 일련의 행동 수칙을 정해 스스로를 구속시킴으로써 도덕적•전략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악한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맞상대하는 적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저력의 원천입니다. 제가 고문을 금지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타나모 교도소 폐쇄를 명령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준수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재천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수호하려던 이상을 포기할 때 우리는 싸움에서 패배합니다. (박수) 우리는 편안한 조건이 아닌 어려운 조건에서 우리의 이상을 떠받듦으로써 그러한 이상을 기립니다.

우리가 전쟁을 택할 때 머리와 가슴으로 고민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드렸습니다. 이제 그러한 비극적인 선택을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주제를 돌려 정의롭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규약을 위반하는 국가들을 상대할 경우 실제로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약 우리가 항구적인 평화를 원한다면 국제사회의 결정이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규약을 위반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제재는 반드시 실질적인 대가를 강제해야 합니다. 비타협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압력을 높여야 하며―그러한 압력은 전세계가 단합된 태도를 견지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시급한 사례 중 하나로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모색하는 노력을 들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중반에 세계 각국은 모든 나라가 원자력을 평화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핵무기 비보유국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무기 보유국은 감축을 추진한다는 분명한 내용을 담은 조약에 합의했습니다. 저는 이 조약을 철저하게 이행할 것입니다. 이는 제 외교 정책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공동으로 미•러 양국의 핵무기를 감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란이나 북한 같은 나라들이 이 체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국제 규약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나라들이라면 그러한 규약이 무시됐을 때 못 본 척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자국의 안보를 걱정하는 나라들이라면 중동 혹은 동아시아 지역의 군비 경쟁 위협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들이라면 핵무기로 무장하는 국가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국제 규약을 위반하고 자국 국민들을 잔혹하게 대우하는 국가들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르푸르에서 인종 말살이, 콩고에서 조직적인 강간이, 버마에서 압제가 자행되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입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교적 노력이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실패할 경우 반드시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보다 굳건하게 단합할수록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인지 혹은 압제를 묵인할 것인지 양자간에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두 번째 항목인 평화의 본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천부의 권리와 개인의 존엄성에 기초한 정의로운 평화만이 진정으로 항구적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인권선언을 작성한 기안자들은 이러한 통찰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평화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인권이 서구의 원리라거나 현지의 문화 혹은 발전 단계에 맞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자국 내 인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로 칭하는 세력들 간에 오랜 동안 갈등이 지속되어왔습니다―이러한 갈등은 편협한 이익의 추구와 전세계에 미국의 가치를 전파하려는 끊임없는 캠페인 사이에서 극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선택을 거부합니다. 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자신이 원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지도자를 선출하고 두려움 없이 집회를 열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 평화는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억눌린 불만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부족과 종교 정체성을 억압하면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유럽이 자유를 얻었을 때 비로소 평화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적이 없으며 미국의 긴밀한 우방국들은 자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부들입니다. 아무리 무감각하게 정의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미국 혹은 세계의 이익을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미국은 언제나 세계보편적인 소망을 표출하는 목소리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웅산 수지 여사와 같은 개혁가들의 온화한 위엄, 모된 매질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게 투표한 짐바브웨 국민들의 용기, 이란 시가지를 조용히 행진했던 수십만 시민들의 행동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국가의 정부지도자들이 다른 어느 나라의 무력보다도 더욱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국 국민들의 소망임이 확실합니다. 바로 이러한 운동—즉, 희망과 역사의 운동—을 우리가 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모든 자유시민과 자유국가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인권의 신장은 훈계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각고의 외교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압제정권을 포용한다는 것이 순수한 분노를 만족스럽게 나타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은 저도 주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용 없는 제재조치—즉, 논의의 과정이 결여된 비난—는 좌절스러운 현상유지만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어떠한 압제정권도 탈출구를 택할 수 없다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문화혁명의 참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 중국으로 하여금 수백만 시민들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열린 사회를 접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과 폴란드간의 교류는 천주교 교회뿐만 아니라 레흐 바웬사 같은 노동운동가에게도 활동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군축 노력과 페레스트로이카의 수용은 구소련과의 관계 개선뿐 아니라 동유럽 전역의 반체제 운동에도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단순한 해법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고립과 포용, 압력과 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 장기적으로 증진됩니다.
 
셋째, 정당한 평화는 시민권 및 정치적 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안정과 기회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란 공포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닌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까지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발전은 뿌리내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충분한 식량이나 깨끗한 물, 생존에 필요한 의약품과 주거지가 제공되지 않는 곳에 안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어린이들이 양질의 교육이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직업을 꿈꿀 수 없는 곳에는 안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희망의 부재는 사회를 내부로부터 곪아 들어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자국 소비용 식량을 생산하거나 각국이 아동 교육 및 환자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전세계가 합심하여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수방관한다면 더욱 심각한 가뭄, 기아, 집단실향민 발생 등 수십 년에 걸쳐 더 많은 분쟁을 야기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임은 과학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이 신속하고 강력한 행동을 촉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여타 국가의 군 지도층은 인류의 공동안보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국가간 합의, 제도 강화, 인권 옹호, 개발 투자, 이 모든 것들이 케네디 대통령이 주창한 사회진화를 일으키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면 우리가 이 같은 과업을 완수할 의지, 결단력, 지속적인 힘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 즉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환원 불가능한 가치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가 서로간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족을 위해 어느 정도 수준의 행복과 성취를 달성하여 우리의 삶을 구현할 기회를 원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어지러운 속도로 진행되는 세계화와 현대의 문화평준화를 고려할 때, 사람들이 자신의 인종, 민족, 그리고 아마 가장 강력한 요소일지 모를 종교 등 자신의 특정한 정체성에 있어 소중히 간직한 것을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공포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랍과 유대인간의 갈등이 굳어져가고 있는 것만 같은 중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보입니다. 민족이라는 경계선에 의해 뿔뿔이 갈라선 국가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험스럽게도, 이슬람교라는 위대한 종교를 왜곡시키고 모독하며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미국을 공격한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살인 행각을 정당화하는 데 이슬람교가 악용되는 방식에서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 이전에도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예는 있었습니다. 십자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떠한 성전(聖戰)도 결코 정당한 전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신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면 절제할 필요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임신부, 의료진, 적십자 직원, 심지어 자신과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까지도 살려둘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뒤틀린 종교관은 평화라는 개념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의 목적 그 자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거대 종교의 한 가지 핵심원칙은 바로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와 같이 우리도 남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준수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 본성에서 일어나는 근본적 갈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오만과 권력 그리고 때로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때로는 우리 앞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처지가 완벽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인간의 본성이 완벽하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줄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상화된 세상에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간디, 마틴 루터 킹 등의 위인들이 실천한 비폭력 정신이 모든 상황에서 현실성이 있거나 가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들이 가르친 사랑—인간의 진보에 대한 근본적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여정을 인도하는 북극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어리석거나 순진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며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에 대해 내리는 결정에서 이러한 믿음을 도외시한다면 인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도덕적 나침반마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전 세대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미래를 거부해야 합니다. 여러 해 전 오늘과 같은 자리에 섰던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에 대한 최후의 대응이 절망일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현 상태가 ‘실존’하기 때문에 인간이 영구히 직면하게 되는 영원한 ‘당위’의 이상을 도덕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는 생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아직도 고동치고 있는 신성의 불꽃—즉, 마땅히 이뤄내야 할 세계를 향해 함께 손을 뻗읍시다. (박수)

오늘날, 바로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세계 어딘가에서 어느 병사는 자신의 화력이 열세에 놓여 있음을 알면서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굳건히 설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어느 젊은 시위대원은 정부의 야만성에 핍박당할 것을 알면서도 행진을 계속할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어딘가에서는 혹독한 가난에 처한 한 어머니가 시간을 내어 아이를 가르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긁어 모아 아이를 학교에 보냅니다. 비록 잔인한 세상이라 해도 자식의 꿈을 이룰 여지가 그래도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본받으며 살아갑시다. 억압이 우리를 언제나 따라다닐 것임을 수긍하면서도 정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부패가 다루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향한 노력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맑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비록 전쟁이 일어날지라도 평화를 향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진보의 이야기이며 모든 세계가 희망하는 바이고 지금과 같은 도전의 시기에 우리가 이곳 지구에서 해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수)


오후 2시 20분(중앙유럽 표준시)

by 나두미키 | 2009/12/14 07:54 |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는... | 트랙백

1등 만한 2등


  "우리는 렌턴카 회사에서 2위입니다. 그런데 왜 고객들은 우리를 이용할까요?"

미국 렌터카 회사인 에이비스(ABIS)의 1963년 광고 카피다. 당시 업체1위는 허츠(Jertz)였다. 에이비스는 허츠보다 뭔가 나은 점을 내세우고 싶었지만, 모든 면에서 2위였다. 고민하던 에이비스는 '넘버 투 캠페인'을 하기로 했다. 대놓고 2등임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2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자신을 2등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광고는 없었기 때문에 먼저 소비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에이비스 직원들은 1등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2등이 되기 위해 더욱 분발했다. 고객에게 빌려줄 차를 세차하고, 재떨이를 깨끗하게 비우고, 기름을 가득 채워 고객의 입장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마음에는 늘 '우리는 2등이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 빛나고 있었다.

 

에이비스는 또 이런 광고를 선보였다.

"당신도 2등이라면 더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2등 심리가 존재한다. 1등은 못되더라도 2등은 된다는 대중심리를 파고 든 이 켐페인은, 소비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에이비스는 엄청난 고객을 확보했고, 오랜 적자를 탈출했다.

 

참고도서: 시원에서 CEO까지 디테일에 잡중하라(김광영, 토네이도)

by 나두미키 | 2009/12/11 07:48 | 새기고 싶은 글 | 트랙백

Han's Letter - 부정적인 것과 이별하라

 
오랜 만에 만나 불행한 일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간만에 만나 친인척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사람의 소식부터 확인한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그 사람은 뭘 해? 혼자 사니 얼마나 애로가 많겠는가. 살림만 하던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밥벌이 하면서 애 키우느라 죽을 지경인 것은 당연하다. 파산하고 도망을 다니는 친척 안부부터 묻는다.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빚쟁이들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의 삶은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데 경제위기로 엉망진창인 것은 당연하다. 부모와 의절하고 사는 친척의 소식도 물어본다. 의절하고 산 게 일 이년 된 일도 아니다. 오래된 일이다. 부모와 연락을 끊고 사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그런 사람이 사위에 며느리까지 보게 되니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자연히 부정적인 얘기가 나온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질문을 하면서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알아낸다. 오랜만에 와서 좋은 얘기도 많고, 잘 나가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지지리 궁상인 사람의 안부만을 꼬치꼬치 묻는 그 분의 속내는 무엇일까?

택시 기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어제 만난 기사가 그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내게 묻는다. “오늘 용산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들었습니까?” 못 들었다고 얘기하자 신이 나서 얘기를 시작한다. “무리한 철거를 진행하다 사고가 났습니다. 아침부터 물 대포를 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대응을 하는 사람들이 화염병을 준비했는데 그것이 컨테이너에 불이 붙으면서 참사가 벌어졌다네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신이 나서 계속 얘기를 한다. “참 대통령이 재수가 없는 것 같아요. 쇠고기 파동이 나고, 경제위기가 나더니, 이번에는 진압하다 사람까지 죽었네요…” 내게 동의를 구했지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런 얘기를 신나게 하는 기사의 속내가 궁금했다. 입으로는 그 사람들이 안 됐다 어떻다 하지만 속으로는 큰 사건이 난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데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은 이웃집 불구경이다. 옆집이 대판으로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웃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기 때 이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남의 불행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다. 그 이유는 상대적 위안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스스로 자위하게 된다. 불이 난 집에 비해 우리 집이 멀쩡하다는 건 큰 기쁨이다. 집어 던지고 소리지르고 싸우는 부부에 비해 별 일 없는 우리 부부관계에 감사를 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이런 심정은 있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다. 하지만 늘 남의 상처를 들추고, 그것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서 자신이 위로 받는 것은 저 차원의 기쁨이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내 행복을 확인하는 것보다는 그것에 관계없이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낫다.

해외에 몇 달씩 나간 경험이 있다. 당연히 한국 관련 소식을 들을 일이 없다. 처음에는 궁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증도 사라진다. 사는데 지장이 없는 것을 떠나 사는 데 오히려 마음이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 평화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신문을 보면서 시작된다. 언론을 비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건과 사고를 파는 사람들이다. 없는 일도 과장해서 큰 일처럼 부풀려야 비즈니스가 잘 되는 사람들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신문과 뉴스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낫다.

당신은 어디서 기쁨을 얻는가? 잘 되는 꼴을 보면 속이 뒤틀리는가? 잘 되는 사람은 만나기도 싫고 그 사람 관련된 얘기는 하기도 싫은가? 남의 행복을 보면서 기뻐하는가, 아니면 남의 불행을 보면서 희희낙낙하는가?

의도가 불순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부정적인 정보를 전하고, 부정적인 정보를 확대 재생산 하는 사람 또한 조심해야 한다. 부정적인 정보를 알아내려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쪽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 또한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다 당신도 부정적인 정보의 전도사가 되고, 결국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근태 대표 kthan@assist.ac.kr

by 나두미키 | 2009/12/10 07:44 | 새기고 싶은 글 | 트랙백

삐딱하면 풀린다

런던에서 80킬로미터 남쪽으로 내려가면 '브라이튼'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런던에서 이 마을로 오는 길이 클래식 자동차 레이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빠른 차가 우승하는 게 아닙니다. 제일 늦은 차가 우승합니다. 물론 중간에 쉬거나 멈춰서는 안됩니다.
혼자 소이치로는 이 레이스를 무엇보다 좋아했습니다. 그는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매년 독특한 고전 의상을 차려입고 출전했습니다. 그는 20대 시절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이 직접 만든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닌 괴짜였습니다.
혼다 소이치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전거에 소형 엔진을 부착한, 즉 지금의 오토바이를 만들어내면서 나중에는 세계 최정상의 오토바이 제조 회사인 혼다 오토바이를 키워낸 저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 후 저공해 CVCC엔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자동차 제조사로서도 한발 우뚝 섰지요.
미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반드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노동자들의 파업에 시달렸는데, 혼다자동차만큼은 한 번도 노동자 파업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다음의 에피소드가 그 이유를 적절히 나타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고 있는데 그를 잘 모르는 젊은 사원이 그를 보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어이, 아저씨!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다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래요?" 그 후 생산직 사원들의 바지 주머니는 모두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혼다 소이치로는 부드럽고 강한 측면을 골고루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가 사원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차갑게 식은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는 주방장을 불러 이 따위 식사를 먹이면 우리 사원이 과연 일을 잘할 수 있겠냐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혼다는 남들과 똑같은 시선을 갖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령, '사장은 특별히 잘난 자리가 아니다. 명령체계를 확실히 해두기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 하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사물의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는 자세, 즉 변화라는 느낌을 중시했지요.
'도전해서 실패함을 두려워 말라.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두려워하라.'
'내가 손댄 사업 중 99%는 실패였다. 1%의 성공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사람에게는 실패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
모두 그의 경영철학이자, 후세의 사람들이 명언으로 간직하는 주옥같은 말입니다.
그는 말년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신제품 개발에서 손을 뗐지만, 젊은 사원들이 뭘 연구하는지는 수시로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나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참 기분이 좋다. 내 나이 들어서 알 정도의 연구를 하는 젊은이들은 어찌 보면 멍청하다. 내가 모르는 일을 연구해주는 젊은이들을 볼 때 난 가장 행복하다."
혼다는 자기가 지독히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서 성공했던 장본인입니다. 그에게는 일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즐거움 자체였습니다. 어떤 기회에 그가 지인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망망대해에 한가롭게 떠 있는 낭만적인 배여행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배 안에서도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옷을 바꿔 입어야 했습니다. 그저 트레이닝 복장으로 하루 종일 뒹구는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스포츠 셔츠 따위로 캐주얼하게 입습니다. 점심에는 정장에 비슷하게 입거나 아침에 입는 복장에 준합니다. 저녁에는 정장이라야 합니다. 남자는 슈트에 넥타이 차림, 여자는 원피스 차림에 액세서리를 곁들여야 합니다. 파티라도 열리면 보다 까다로운 정장 차림이 요구됩니다.
듣기만 해도 뭔가 귀찮아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바다까지 나가서 배 여행을 하는데 그렇게 격식을 갖추면서 몸과 마음을 풀어놓지 못하는지 자못 궁금해지도 합니다. 그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주간 동안 그 까다롭고 귀찮은 규칙에 동참하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매번 옷을 갈아입는게 정신 위생상 좋다는 걸 말이지요. 사람은 너무 풀어놓으면, 오히려 재미가 반감된다고 합니다. 약간의 긴장감이 오히려 재미를 증폭시킬 수 있지요.
혼다는 스트레스를 색다르게 정의합니다.
Streess : S-sports / T-travel / R-recreation / E-eat / S-sleep / S-smile
즉, 운동하고 여행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자는 뜻입니다. 인생의 단맛을 내는 행복 소스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유명한 화장품 메이커인 시세이도가 사회봉사활동의 일환으로 한 양로원에서 치매노인을 상대로 메이크업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고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관점을 벗어나 삐딱하게 봤으니 효과적이지요.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는 하늘에 던져진 종이비행기처럼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닌다고 해방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변화는 스스로 일으키는 화학작용입니다. 변화는 모르고 있던 새로움을 문득 안겨주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길에는 변화라는 지도만 갖고 가면 됩니다. 변화는 우리의 잠재능력을 한층 북돋워주는 거름 같은 존재입니다.
스트레스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기도 합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일이 내게 맞지 않거나, 아니면 방법이 잘못 되었을 겁니다.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고민, 갈등은 사물을 삐딱하게 보는데서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굳어진 우리의 일상이 스트레스의 주범일 수도 있지요.
편안하기만 하다고 걱정이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편안함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해야 오래가고 행복하지요.

 

글 오세웅

출처 행복한 인생

by 나두미키 | 2009/12/10 07:43 | 새기고 싶은 글 | 트랙백

긍정적인 인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가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형은 거리의 걸인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동생은 박사 학위를 받고
훌륭한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들의 사정을 듣고
어떻게 똑같은 환경에서
이렇게 다른 인물이 나오게 되었는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기자는
특이한 액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자란 집에는
`Dream is nowhere.(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적힌 조그만 액자가 있었습니다.
기자는 형제에게 그 액자가
기억나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있었죠.
Dream is nowhere.(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
20년 넘게 우리 집에 있던 액자였죠.
전 늘 그것을 보며 자랐어요."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동생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있었죠. 하지만 저는
띄어쓰기를 달리 해서 보았죠.

Dream is now here.

(꿈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전 늘 그렇게 생각하며 자랐죠."

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by 나두미키 | 2009/12/03 12:15 | 새기고 싶은 글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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